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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Cho Jihoon(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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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Cho Jihoon
Family Name
Cho
First Name
Jihoon
Middle Name
-
Preferred Name
Cho Jihoon
Pen Name
Cho Chi-hun, Cho Chi-hun, Cho Jihoon
ISNI
0000000084304458
Birth
1920
Death
1968
Occupation
Writer
Period
Modern
Representative Works
-
  • Descriptions
  • English(English)
  • Spanish(Español)
  • Japanese(日本語)
  • French(Français)
  • Korean(한국어)

Cho Jihoon (December 3, 1920 – May 17, 1968) was a Korean poet, critic, and activist. 


Life

Cho Jihoon was born Cho Dong-tak on December 3, 1920 in Yeongyang, North Gyeongsang Province,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rule. He made his literary debut in 1939, when his poems "Gopunguisang" (고풍의상 Traditional Dress) and "Seungmu" (승무 The Nun's Dance) were published in the magazine Munjang. 

Cho graduated from Hyehwa College in 1941 with a degree in liberal arts. He taught at Odaesan Buddhist College and in 1946, after Korea's liberation, and founded the Association of Young Writers. Cho also served as president of the Society of Korean Poets and from 1947 served as a professor at Korea University. Cho was also the first head of the Korea University National Culture Research Institute. He died on May 17, 1968. 

Cho's birthplace is preserved in Irwol-myeon, Yeongyang. A memorial to him stands on Namsan in Seoul.


Writing

Cho Jihoon's love of classical Korean beauty is well expressed in his work, evoking within the reader a feeling of peace and tranquility, as typified in his poem "Seungmu." Another of his early poems, "Bonghwangsu" (봉황수 The Grief of the Phoenix), written in 1940 at the height of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while keenly describing several secrets of the architectural beauty of the palace, contrasts those who held sovereign power in the Joseon era with the intellectuals of the colonial period, exposing the pain and tragic feelings of the oppressed classes. Cho's first poems, capturing the lyrical expressio of Korea's traditional and national consciousness, are contained in Cheongnokjip (청록집 Blue Deer Anthology), a joint collection published with fellow poets Park Dujin and Park Mok-wol. 

Directly after Korea's liberation, Cho asserted that only those who guarded a purely poetic aesthetic could be considered poets, and emphasized that the protection of individual freedom and the quest for the liberation of human nature was the essence of poetry. This literary purity and nationalistic fervor are proclaimed in the poet’s patriotic voice in his collection, Yeoksa Apeseo (역사 앞에서 Standing Before History). The work criticizes, with a lucid historical consciousness, the political corruption and social irrationality engendered by the national division and internal strife of the day. In particular, "Dabuwoneseo" (다부원에서 At Dabuwon) is one of the finest examples of war poetry that keenly depicts the tragic state of internal strife based on personal experience.


Cho Chi-hun nació el 3 de diciembre de 1920 en Yeongyang, provincia de Gyeongsang del Norte, durante la dominación japonesa de Corea.2​ Su nombre al nacer fue Cho Dongtak. Se graduó de la Escuela Hyehwa en 1941 en Artes Liberales. Enseñó en el colegio budista Odaesan y en 1946, después de la liberación de Corea, fundó la Asociación de Escritores Jóvenes (Cheongnyeon munhakga hyeophoe). También fue presidente de la Asociación de Poetas Coreanos (Hanguk Siin hyeophoe) y desde 1947, profesor de la Universidad de Corea. También fue el primer presidente del Instituto de Investigación de la Cultura de la Universidad de Corea. Falleció el 17 de mayo de 1968.1​ (..)

1920年12月3日、慶尚北道英陽郡日月面主谷洞202番地に生まれる。父は趙憲泳で、後に制憲国会議員と二代目国会議員になるが、朝鮮戦争のときに被北した。母は全州李氏。兄の趙東振も詩人である。趙は幼い頃から17歳まで祖父に漢文を学び、普通学校には3年通っただけであった。当時の文士が新教育を受けるために日本に留学したり、近代教育を実践する学校に通ったりしたのにたいして、趙は漢文という朝鮮の伝統的教育を受けて育った。このことが、趙の朝鮮的情感を豊かにする助けとなったと言える。しかし、新文学の雑誌等を読むことで、当時流行していたプロレタリア文学に敏感に反応し、8歳でプロレタリア思考の童謡を作っている。

1936年、上京し、呉一島の経営する詩苑社に入り、詩文学派の影響を受けながら習作する。ボードレール、ドストエフスキー、フローベール、ワイルド等に耽溺し、また民族文化についての学術書を読み始める。1939年、父が上京してきて明倫洞に住むと、趙は父と生活する。同年、恵化専門学校文科に入学する。恵化専門学校の授業中、落書きのつもりで書いた詩「古風衣裳」をそのまま封筒に入れて投函したのが『文章』の選者、鄭芝溶の目に留まった。これにより、趙は詩人として文壇にデビューする。1940年には同人誌『白紙』を発刊するが、同人達が検挙されたために3号までで廃刊となった。

1940年、宣城金氏の娘、金蘭姫と結婚する。1941年、恵化専門学校を卒業すると、江原道の五台山にある月精寺に赴き、仏教講院の外典講師になり、ここで禅を学んだ。その後、趙の詩は情緒と主観を排した無奇妙主義と言われる傾向に変わっていく。趙の健康はこの頃から悪化し、1941年秋には下山してソウルに戻った。朝鮮語学会の『大辞典(큰사전)』の編纂にあたる予定であったが、1942年に日帝の一斉検挙(朝鮮語学会事件)があり、編纂事業は中断された。趙は会員でなかったために検挙を免れた。1943年、故郷に戻り1945年の解放まで郷里で過ごす。密かに青年会を組織しハングルを教えていた。

1945年8月15日、解放を迎えると、趙は9月に上京する。朝鮮文化建設協会会員や明倫専門学校の講師になり、またハングル学会の教本、震檀学会の国史教本の編纂員として国文学の教育に参加する。1946年6月、朴斗鎮、朴木月らと三人詩集『青鹿集』(乙酉文化社)を刊行する。これをもって、趙等は「青鹿派」と呼ばれるようになる。趙は1947年に高麗大学校の教授に就任すると20年間、高麗大で教鞭を執った。1963年、高麗大に民族文化研究所が設置されると、初代所長に就任し、『韓国文化体系』を企画、編纂し、その第1巻として『韓国民族運動史』を執筆した。さらに『韓国文化史序説』を執筆し、高い評価を得ている。病魔が趙の身体を蝕み、講義は休みがちであったが、趙の講義は学生達に好評で多くの弟子が趙から育った。

1968年2月、終に病に倒れる。吐血がひどく、5月16日にメディカルセンターに入院するが、すでに手遅れであった。1968年5月17日午前5時40分、気管支拡張のため、死亡する。その遺骸は同月21日、京畿道楊州郡磨石里(現在の南楊州市)松羅山の麓に埋葬された。1972年、ソウル南山に詩「芭蕉雨」が刻まれた「趙芝薫詩碑」が建てられた。(..)

En 1939, Cho Chi-hun commence ses études à l'université Dongguk (connue à l'époque sous le nom d'école Hyehwa)2. Après l'indépendance de la Corée, il fut professeur et instructeur dans un lycée public de filles, à l'université Dongguk, à l'université de Corée ainsi qu'à la réunion internationale de poésie qui a eu lieu en 1961 en Belgique et qui a réuni des représentants de la Corée. (..)

조지훈(1920~1968)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생애

조지훈(본명: 조동탁)은 1920년 경상북도 영양에서 태어났다. 선비의 가문에서 태어나 할아버지로부터 한문과 국문을 배웠으며, 9세에 시를 지었다고 한다. 보통학교를 3년 수학하고 중학 과정은 독학으로 마쳤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1939년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시 〈고풍의상〉, 〈봉황수〉, 〈승무〉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 들어가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으며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했다. 이듬해에는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기도 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민족 문화를 되살리기 위하여 명륜전문학교 강사로 일했으며 아울러 한글학회 국어 교본 편찬원, 진단학회(震檀學會) 국사 교본 편찬원으로서 활동했다. 1946년 경기여고 교사로 지내던 중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조교수에 취임했다. 또한 김동리, 조연현, 그밖에도 많은 문인들과 함께 ‘한국 문학가 협회’ 창립위원이 되어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 문학의 육성에 힘썼다.

만년에는 시작(詩作)보다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 사업을 추진하였다.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작품세계

조지훈은 해방 후 문단에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보다는 보편적 공감에 바탕을 둔 시 정신을 지키고자 했다. 그는 정치적 경향을 지닌 문학의 맹목성을 지적하면서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생명의 요구’, ‘생활의 표현’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이라 주장했다. 그의 태도는 고전주의적 정신으로 이어지며 한국문학의 새로운 고전주의적 문학의 확립에 기여했다.  

해방 직후 발표한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산상의 노래〉(1945)는 해방의 기쁨과 새로운 과제를 고민하는 시적 자아의 내면을 고백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는 혼란을 극복하고 균형을 지향하는 조지훈의 정신이 담겨 있다. 특히 시적 형식에 있어서 다양한 정서적인 충동을 포괄하고자 하고 있으며, 절제의 언어와 정서의 균형을 통해 조화로운 언어를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전쟁 이후 발표한 시집 《풀잎 단장》(1952), 《조지훈시선》(1956), 《역사 앞에서》(1959) 등에서는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확대한다. 《역사 앞에서》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표출하였는데, 특히 〈다부원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동족상잔의 비극적 순간을 표현하였다.  

조지훈의 시는 유교적인 도덕주의를 토대로 한 자연 인식과 융합된 삶의 의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시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또한, 《풀잎 단장》과 《조지훈시선》은 《청록집》에서 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주요 작품

1) 전집

《조지훈 전집》, 일지사, 1973.

《조지훈 전집》, 나남, 1996(개정판, 2016)


2) 시집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풀잎단장》, 창조사, 1952.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여운》, 일조각, 1964.


3) 산문집

《시와 인생》, 박영사, 1953.

《시의 원리》, 산호장, 1953.

《돌의 미학》, 고대출판부, 1964.

《한국문화사서설》, 탐구당, 1964.


4) 기타

《지조론》, 삼중당, 1962.


수상 내역

1956년 자유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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